홈으로가기

제1편 고전40선

(고전의 가치)

어렵고 따분한 고전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수 있는 사이버상의 정보들이 훨씬 감각적이고, 흥미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적 삶의 유대와 행복이 확대되는 계기에는 타성적이고 감각적인 안일보다는 언제나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지성이 자리하여 왔음을 알수있다. 그 지성의 열매가 다름아닌 고전이다. 고전은 인간적 삶의 가치와 의미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며 감동으로 전해진다.

 

<동서양 고전 40편 요약 수록>

-작업중-

1. 원효의 대승 기신론소 : 원효(617~686)는 진평왕36년 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육두품으로 중국의 유학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파계하여 자식도 낳았다. 신문왕 6년에 70세로 타계하였다. 대승기승론, 금강삼매경론, 열반종요, 십문화쟁론, 보살계본지범요기 등의 저술이 있다.

2. 일연의 삼국유사 : 일연(1206~1289)이 고려후기 최씨 집권과 대몽항쟁을 거쳐 고려가 굴복하고 원의 간섭을 받았던 격변기였다. 희종2년 경주의 속현인 장산(경산)의 향리 가문에서 태어나 이름은 김견명, 자는 회연, 자호는 목암 이였다. 9세에 절에들어가 공부하다가 14세에 선종 가지산문에 속하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계를 받았다. 22세에 승과에 최우등합격. 1259년에 대선사가 되고 1283년에 충렬왕으로부터 국존(국사)에 봉해져 전불교 교단을 대표했다. 인각사에서 선종 교단을 이끌었다. 1289년에 입적 충렬왕에게 보각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보각국존비와 부도가 인각사에 세워졌다. 저술은 삼국유사외에 중편조동오위 등 10여편.

3. 정도전의 삼봉집 :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 자는 종지, 본관은 봉화로서 아버지 정운경 이고 어머니 우연의 서녀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의 문화에서 공부 1362 공민왕 11년 과거에 급제 관직을 시작하였다. 1375년 (우왕1년) 북원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것에 반발 나주로 귀양을 갔다. 이성계가 위하도 회군을 단행 천거로 요직에 등용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주도적 역할로 공신에 책봉되었다. 공양왕 3년에 과전법 시행과정에서 반대파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한뒤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해에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반대파를 숙청하였다. 개국후 태조의 두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중요한 역할를 하였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문서를 문제삼아 정도전 명나라 입조요구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1397년 요동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이방원에게피살.

4. 이황의 성학십도와 이이의 성학집요 : ★이황(1507~1570)의 호는 퇴계, 자는 경호이다. 34세에 과거에 급제관직등용1545년 을사사화후 사퇴, 1548년 풍기군수 백운동서원 사액요청 실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50세이후 고향안동에 머물면서 독서 수양 저술 전념, 선조가 즉위한후 68세대 대제학에 임명되어 무진육조소를 올려으며 곧이어선조의 교육을 위해 성학십도를 만들어 바쳤다. 그는 이와 기를 구분하는 가운데 이를강조하여 기뿐만아니라 이도 움직인다는 이기호발성을 주장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영남지방의 문인들의 중심이된 퇴계학파를 형성 일본의 유학계에 큰 영향.

★이이(1536~1584)의 호는 율곡, 자는 숙헌이며, 어머니 사임당 신씨이다. 29세때부터 벼슬을 시작, 40세부터는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인물로 부상했다.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을 지어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41세때 동인 서인 대립 심화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 45세때 다시 관직에 복귀 판서등 중책을 맡으면서 개혁과 동서인의 갈등을 해소에 노력하였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 이발을 인정하지않고 기발만을 주장하면서 현실적으로 이와 기를 분리할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기지묘를 강조하였고 나아가 이통기국을 주장하였다.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율곡학파형성, 서인과 노론이 되어 조선후기 집권층 형성

5. 허준의 동의보감 : 허준(1539~1615)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 1569년에 내의원 의원으로 천거되었다. 어의 양예수 등으로부터 수업을 받았고 내의첨정, 내의정 등 승진을 거듭 1581년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을 왕명에 의하여 직접 교정출간, 1590년 당시 왕자 (광해군)의 천연두를 치료함으로 의관 당상관직을 제수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자 왕궁을 떠나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노쇠한 양예수를 대신해서 내의원을 주도해 나갔다. 1600년 양예수가 사망하자 의서편찬에 주력 언해태산집요, 산부인과용의서, 언해두창집요, 소아용의서, 언해구급방, 장부용의서, 그리고 본격적인 종합의서인 동의보감을 간행중 선조가 죽자 관례대로 수의로서 귀양가게되었다. 이듬해 동의보감25권을 완성 그뒤 1613년과 1614년 연이어 성홍열이 창궐하자 신창벽온방과 벽역신방을 저술하였다. 1615년 광해군 7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정부에서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하였다.

6. 정약용의 목민심서 : 정약용(1762~1836)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여러고을 수령을 하였기에 이곳 저곳을 따라다니면서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기호 남인집안이였으므로 어렸을때 이가환, 이승훈 등을 통해 실학의 거두 이익의 학문에 접할수 있었다. 28세때 벼슬길에 올랐는데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많은 서적을 열람하고 박제가 등과 교류하면서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할수 있었다. 1797년 암행어사 로 지방수령들의 잘못을 조사하고 곡산 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농민의 실상을 직접보고 들었다. 1800년 정조가죽자 어린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잡은 노론은 남인들을 치려고 천주교 탄압령을 내렸다. 당시 남인가운데 천주교도들이 많았는데 정약용의 형제들은 체포되어 세째 약종은 사형을 받고, 둘째 형 약전과 약용은 귀양을 갔다.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갔는데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 귀양살이를 하면서 경세유표오 목민심서를 풀려난 후에는 흠흠신서, 그외에도 수백권의 저서를 남겼다.

7. 최한기의 기측체의 : 최한기(1803~1877)는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지로, 호는 혜강, 패동, 명남루 등이다. 생부 최치현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인물로서 개성지역의 유학자들과 친밀하였고 양부 최광현은 1800년 무과에 급제하여곤양군수가 되였으며, 품계는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최한기는 상인, 통역관, 기술자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함으로 급변하는 정세와 국내외 새로운 학술정보를 수집하고 예수회 선교사들과 접촉 유교적 질서에서 세계적 질서로 확대되는 역사적 대변동을 깨닫고 이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새 사상을 내놓았다. 기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었는데 서구에서 소개된 자연과학과 기술의 합리성을 인식하고 사물에 대한 경험적 연구 방법을 중시함으로서 유가 전통의 윤리정치사상과 서구의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에따라 그의 저술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학등의 영역에 걸치는 방대한작업이 되었다. 자연 및 기술학의 저작으로는 농정화요, 육해법, 심기도설, 성기운화, 운화측험, 신기천험, 등이 있고, 인간학, 사회학 영역으로는 기학, 인정 등이있다. 한국사상에는 그는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개화사상을 여는 역할를 하였으며, 유가적 경제 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심화함으로서 철학사의 발전에 기여

8. 주역 : 주역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일까? 이 기본적인 의문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여러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것은 복희씨가 팔괘와 육십사괘를 그렸다는 설 (왕필), 그리고 복희씨를 제외한 문왕, 주공, 공자는 모두 주대의 사람이므로 주역이라는 명칭과 부합한다. 여러사람의 저술이 누적된 것이라는 점에서 정확한 성서 연대와 작자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천지가 음양으로 이루어졌듯이 인체도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고 부조화일때 병이생긴다. )

9. 공자의 논어 : 공자(BC551~BC479)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중국의 동부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태어난 때는 주나라 후기 였으며 역사상 춘추 시대라고 불리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BC 11세기 건국되었던 주나라는 BC 8시기까지 번영을 구가하다가 이후 점차 국운이 쇠락 해체기로 접어들고 주왕실과 밀접했던 노나리는 주나라 문화와 제도가 잘 보존되어 있었고, 중년에 공자는 노나라에서 대사구 벼슬을 하면서 봉건적 위계질서의 회복을 내걸고 기울어 가는 노나라 왕실을 보위하고자 애썼으나 지는해는 되돌릴수 없었다. 노나라 실권자에게 추방되어 50대후반부터 각 나라를 떠돌며 자신을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해맸으나 등용해줄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노나라 정세가 바뀌어 공자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집권하자 공자는 68세에 나이로 비로소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으며 이후 훗날 유가의 경전이 될 육경을 편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전념 73세 나이로 세상을 마감. (지혜로운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나 어진사람은 조용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천수를 누린다. )

10. 노자의 도덕경 : 노자는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자 도가의 창시자로 전해진다. 그는 노담이라고 하며 성은 李, 이름은 耳, 자는 백양으로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출신이다. 사기 노자전에 의거하면 노자는 공자의 선배이다. 사기를 믿는다면 주나라 사관을 지낸 노자에게 공자가 제도를 의미하는 예를 물었다는 것은 가능하다. 사관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왕에게 통치를 위한 자문도 할수 있는 직책이므로 정치 문화적 제도에 대해 해박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보다는 유가를 더 앞세우는 학자들에게는 공자를 선배로 보고싶은 유혹이 잇을수도 있다. 그들은 논어와 맹자에 노자의 이름이 거론되지않다가 순자와 장자에서 출현한다거나 문체의 시대적 차이등을 이유로 노자가 공자 이후 장자나 순자 이전의 전국시기에 생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하나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지 정설은 아니다. 노자의 생존연대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곽점의 초나라 묘에서 발굴된 노자 도덕경 일부가 전국 중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노자의 연대는 그 이후는 아닐것임이 확실하다. 도덕경은 일종의 철학시이다. 그것은 로마의 유물론자인 루크레티우스BC91~BC51가 청명한 자연을 찬양하면서 자연에 대하여를 철학시로 쓴 것과 유사하다.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에 의거해서 해명되어 왔다. 현재 도덕경은 한의 하상공본과 위진시대의 왕필본이 있는데 하상공본은 상편을 도경, 하편을 덕경으로 나누고 있다. (노자는 유가적 인본주의와는 달리 자연중심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 그는 자연을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도를 사유했는데 노자의 형이상학은 생의 비참성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열망에서 근거한 것이다. )

11. 바가바드기타 : 지존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슈나 신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이다. 기타의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그것은 세계에 가장 긴 서사시 마하마라타의 지극히 중요한 일부이다. 기원전 2~3세기로 추정한다. 기타를 신의 지혜로 받아들이는 힌두교도에게 저자와 저작연대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지않다. 영적인 진리는 무시간이며 무저자이기때문이다. (기타는 카르마(행위)의 복음, 박티(신애)의 복음, 그리고 즈냐나(지식)의 복음을 포함하고있다. 인생의 전체조화이다. 하지만 봉사의 복음이 기초이다. 아힘사(비폭력), 샤트야(진리), 브라마차르야(청정행), 아파리그라하(무소유), 아스테야(불투도) 다섯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

12. 사마천의 사기 : 사마천(BC 145?~BC86?)은 용문 즉 지금의 섬서성 한성 출생으로 그의 생존연대는 대략 한무제가 통치하던 시기 (BC 141~ BC87)와 일치한다 그 당시는 중국역사에서 거대한 정치적 통합의 완성기로서 사회, 경제가 안정되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지배가 강화됨과 함께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국력이 대외적으로 팽창되던 전성기였다. 태사공 자서에 의하면 그의 가문은 기원전 9세기 무렵부터 주왕실에서 천문을 시작하였다. 20세 무렵에는 양자강 남북에 걸친 대 여행의 길을 떠나 22~23세 무렵에 낭중이 되어 관직에 나아갔지만 수년뒤에 다시 한나라의 서남지역을 답사하였다. 이런 답사의 견문이 후일 사기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자신이 못다한 역사적 집필을 완성해 줄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부친사후 3년 뒤 (BC 108) 태사령 직을 이어받은 사마천은 역사서 편찬을 준비하였다. 사기의 집필은 BC 104 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BC 99년 흉노에 항복한 비운의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 즉 남근을 제거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2년 뒤에는 사면되어 중서령이란 관직에 기용되었지만 죽음보다 더한 굴욕감에 시달리면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였다. (사기는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탁월한 문학성과 문장력이 결합된 최고의 문학품이다.)

13. 왕수인의 전습록 : 왕수인(1472~1528)은 중국명나라의 철학자이다. 여요 출생으로 호를 양명이라고한다. 어려서 전쟁놀이를 좋아하였으며 18세부터 누일재 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21세때 모든사물에 각각의 이치가 들어있다는 주희의 격물치지론을 실험하려고 친구와 함께 대나무 앞에 앉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대나무 이치를 탐구하였다. 친구는 3일만에 쓰러지고 7일만에 병이 났지만 여전히 나는 나대로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 뒤 28세부터 벼슬에 나갔으나 37세때 당시 세력을 갖고있던 환관 유근의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산골마을 용장의 역승으로 쫒겨나 있으면서 마침내 내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를 깨달았다. 그는 마음의 본모습은 양지이며 이것이 만물의 존재 근거라는 점에서 만물일체론을 주장하였고 38세에는 마음의 움직임이 이의 구현이라는 지행합일론으로 나아갔다. 그 뒤 49세에는 사상마련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양지에 도달한다는 치양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장군으로 많은 민란을 토벌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그의 학문에 주자학의 이지적 측면과 달리 파토스적 요소가 많은 것도 이 같은 삶과 관련이 있다. 또한 그의 사상에 평등지향요소가 많은데도 오히려 민란 토벌에 적극적이었던 점이 모순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피고지는 것이니 과연 내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왕수인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전에는 이꽃과 그대가 모두 고요할 뿐이였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때 비로소 빛깔이 곱고 향기가 있었으니 곧 이 꽃은 그대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

14. 마오쩌둥의 모순록 : 마오쩌둥(1893~1978)은 중국 호남성 상담현에서 태어났다. 청대말 당시 중국은 서양의 충격을 받고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중국의 패권은 서구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무너졌다. 18세 되던해 청은 산해혁명에 의해 중화민국으로 바뀌였으나 반식민지 상태는 변하지 않았다. 25세에 고향 호남성 장사의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 도서관의 직원이 되었고 1921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공산당의 창당 맴버가 되었다. 공산당의 홍군이 정부군인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게 패주당하던 1935년 중공당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937~45년까지 중공당은 중국을 전면 침공한 일본에 항전하였다. 1945국민당을 타이완으로 패퇴시키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자력으로 건국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의 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으로 명명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블어 중국의 지도적인 이념으로 1945년 공식인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1970년대 말 등장한 덩샤오핑 정권에 의해 부분적으로 비판당한다. (모순론은 실천론과 더블어 마오쩌둥의 저작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문장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모순의 운동법칙이다. 즉 모순은 모든 사물의 발전 과정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모순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여 모순의 절대성과 보편성 이다. 사물을 파악함에 있어 그것이 무엇인가? 또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중요시 않고 반면에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

15. 플라톤의 국가 : 플라톤(BC 428~BC 348)은 아테네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며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이였다. 아카데미아 학교를세워 수학과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 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BC 384~ BC322)이다. 플라톤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는데 향연을 보면 어쩌면 그가 동성애를 하지 않았나 하는 기미도 엿보인다. 특히 국가는 주의 깊게 짜인 철학적 견해를 모순없는 하나의 체계로 형성할수 있는 일정한 원리들의 진리를 확립하려 하고 있다. (플라톤의 현실주의적 경향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어져 개인도 도덕적 삶은 정치학으로 각각 나누워져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특히 토마스모어(1477~1535)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좋은 장소를 의미하는 점에서 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착상을 부활시킨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플라톤을 성자로 추대하고자 거론할 정도로 크게 찬양하였다.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으므로 필요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분업을 행한다. 이에 따라 사회계층은 통치, 군인, 서민 생산계층으로 나눈다. 플라톤에 있어서 민주정은 공공성의 상실, 전문성의 무시, 대중영합의 정치, 자유방임을 초래하는 정치형태이다. 그리하여 민주정이 타락의 최종단계인 참주정 국가를 낳게되면서 인간은 야만스러운 예속상태에 놓이게 된다. )

16.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는 마케도니아의 스타가라에서 태어났다. 순수한 그리스 혈통이지만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왕 아민티스2세의 시의였고 그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일생동안 친마케도니아계로 지목받았다. 해부학 생물학에 관심 훈련후 17세때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20년동안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첬다.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왕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이 된다. 필리포스 왕이 죽자 아테네로 돌아와 철학 학원 리케이온을 창립하고 연구에 몰두중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마케도니아 피의 추종자로 지목되어 위험한 처지에 빠진다.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인 에우보이아 칼카스에서 지병인 소화불량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그는 대머리에 눈이 작고 다리도 가는데다 혀도 굳어 말더듬이였고, 여자처럼 나약하였다한다. 아들이 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중세의 대학에서 철학자라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통할정도로 권위를 누렸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저술 목록 물리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예술론, 심리학, 박물학, 등을 포괄한다.)

17.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 아우구스티누스(354~430)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지방 남서쪽 소도시 타카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로마의 관원으로서 기독교와 무관하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도로서 아우구스트누수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고백론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청소년 시절을 방종하게 지냈으나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다 밀라노에서 만난 암브로시우스 신부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전향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후 35년간 교구일 일을 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교회와 로마제국에 대한 역사적 고찰를 통해 종말론적 역사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신의나라를 저술했고 , 시편강해, 요한복음서 강해, 를 비롯 이단에 대한 논박을 다룬 책등을 펴내 카톨릭 신학의 버팀목이 되었다. )

18.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 데카르트(1596~1650)는 프랑스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 군대에 입대해 2년동안 복무하고 거기서 수학자 이시크 베크만을 만나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된 수학적 자연학의 이념에 많은 시사를 받았다. 당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네덜란드에서 평생의거처로 정하고 주요 저작을 집필하였다. 보헤미아의 왕녀 엘리자베스(1618~80)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명성에 걸맞게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1626~89)에게 초대되어 스톡홀름으로 갔지만 아침 일찍강의해야 하는 것이 화근이되어 그 다음해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저작으로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진리가 제시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서 실험과 귀납을 중시한 경험론적 사고 방식과 더블어 근대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면서 오늘날 과학문명을 여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기하학의 증명에서 모든 명제가 공리에서 연역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역시 수학적 방법에 의해 특수과학의 내적연관을 통일하고 기초짓는 근본원리이자 보편학의 이념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선언은 확실성의 기초가 인간이성으로 전환을 선언하는 것이다. 근세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면서 오늘날 과학문명을 여는 사상적 기반이 되였다.)

19. 로크의 정부론 : 존 로크(1632~1704) 는 근대철학의 3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경험론을 최초로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으며 또한 현대의 지배적인 사회 사상인 자유주의 전통을 세운 철학자이다. 영국 링턴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칼리지를 다니면서 데카르트 저서들을 탐독하며 철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었다. 한동안 의학을 깊이 연구하기도 하였다. 정치적활동으로 네덜란드에 망명을 하기까지 하였다. 저술에는 관용론, 정부론, 인간오성론, 등이 있다. (정부론은 홉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군주제는 정당성을 갖지못하는 정치형태이다. 국민의 동의에 의해 성립된 정부도 권력분립을 힘주어 옹호한다. )

20. 몽테스키외의 법의정신 : 몽테스키외(1689~1755)는 프랑스 정치 철학자로서 무인 가게에 속하는 아버지와 영국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포도밭 소유였던 어머니는 가문의 재산을 늘려주었으며 그에게 남작령을 물려주었다. 몽테스키외는 법학을 공부하고 1708년에 변호사가 되었다. 1721년에 페르시인의 편지 를 출판함으로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는 부인에게 전재산을 위임하고 여러나라로 여행을 시작한다. 1731년 까지 영국에 머물면서 1748년에 법의 정신을 출판하여 정치이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입법권, 집행권, 재판권 세 종류의 권력은 분립되어야 한다. 자연법은 불변하지만 시민법은 우연성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훗날 루소에게 원리 혹은 원칙에 무관심한 태도라고 비판받는다.)

21. 루소의 에밀 : 신은 나에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양심을 선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선을 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주시지 않았던가? 루소(1712~1778)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버지마저 결투사건에 얽혀 제네바를 떠나자 외가에서 자랐다. 16세에 고향을 등진 루소는 후원자인 바랑 남작 부인을 만나 철학자, 문인, 음악가가 되기위한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고 파리로 진출 1745년에 하숙집 하녀와 동거시작하였다. 1750년에 아카데미 공모에 당선 유럽 지성계에 화려하게 등단했으며 또한 에피네 부인이 제공한 은자암에서 저술을 구상하던중 부인의 시누이인 우드토 부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철학자들과 불화를 격게되었다. 이때부터 당국의 탄압을 받아 도피의 여정을 걷게되고 피해망상증이 악화되었다. 1765년 프랑스에 돌아와 악보 필사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테레즈와 정식으로 결혼 1770년에 고백록이 출간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현실이 아닌 공상임을 전제한다. 사회라는 분모에 의해서 좌우되는 존재가 자연인이다. 루소는 당대의 풍습과 도덕, 문화, 정치, 및 사회체제에대한 총체적 비판을 하였고 사적인 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공동체적인 자아의 육성을 모색, 자연과 사회 혹은 문명의 조화, 화해 또는 양립을 추구하였다. 기존의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양심이라는 내면적인 목소리를 통해 신과 자연의 질서에 참여하는 행동과 도덕의 중요성을 역설 구세주는 신의 아들도아니고 신도아니며 우리가 본받아야할 완벽한 인간일뿐이다. 여성은 자연이 부여한 수동적인 유약성을 통하여 남성들을 기쁘게 하기위하여 태어났다. )

22. 스미스의 국부론 :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유럽의 중상주의적 사회질서가 자유롭고 민주적인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로 전환해 가던 시기 시장자유주의의 확립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최선의 접경이라 주창하고 경제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시킨 사람이다. 글레스고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공리주의학파 창시자였던 허치신 교수로부터 자유주의적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1748~1751년 까지 에든버러 대학에서 영문학, 문학비평, 법학을 강의하였다. 이때의 강의는 경제문제에 관한 최초의 시론으로, 여기에서 이미 사물의 자연적 경로 를 강조하며 경제의 자유주의 골격을 형성시켰다. 이어 1751년 부터 글레스고 대학의 논리학교수로 12년간 도덕철학을 강의하였다. 그의 강의는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경제학 등 네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제2부에 해당하는 윤리학 내용이 1757년 도덕감정론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1764~1766년 가을까지 3년여의 유럽여행에서 중농주의 학파의 자연법 사상을 접하고 귀국하여 고향에 묻혀 저술에 몰두한 끝에 1776년 3월 국부론 제 국민의 부의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 출간하였다. 만년에 글레스고 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출간되지 못한 원고들은 죽기직전에 모두 소각해 버렸기 때문에 저서로 남은 것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권뿐이다. 따라서 국부론은 경제학에 관한 그의 최초이자 최후의 저서로서 후대의 경제학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 사회는 정치적으로는시민혁명,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두 혁명은 영국이 가장 먼저 수행하였다. 명예혁명으로 영국은 스미스가 출생한 18세기 초에는 상당한 부의 축적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 에로의 변혁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23.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칸트(1724~1804)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궁핍한 마구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루터 교회의 일파로서 그 영향을 받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뉴턴 물리학과 울프 논리학을 배웠고 졸업후 7년간 가정교사생활을 거쳐 31세가 되는 1755년에 모교의 사강사로 교편을 잡지만 1770년에야 간신히 정교수가 된다. 1770년 교수 취직논문 감성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원리 를 발표한 후, 집필활동을 중지했다가 1781년에 긴 침묵을 깨고 그간의 생각을 정리하여 한권의 책을 발간했는데 그 책이 곧 순수이성비판으로서 칸트 비판 철학을 알리는 대작이다.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이후 프롤레고메나, 도덕형이상학원론,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 이른바 칸트의 3비판서중 나머지 두권을 비롯하여 이성의한계내에서의 종교, 영구평화론, 등, 다수의 저서가 출판되었다. 칸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시계를 마추었다는 일화는 엄격하고 절제된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한편 쾌활한 성격에 위트가 넘쳤으며 당구도 즐기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몸소 요리한 음식을 즐기기도 하였다. 칸트의 선험적 비판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비판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근대철학의 논쟁과 대립을 종합함으로서 근대 자연과학기반의 철학적 기초를 밝히는 등 유럽 사상계는 칸트의 출현에 의해 일대 혁명기를 맞았다. 칸트는 대학총장을 두번이나 역임하였고, 72세 대학에서 은퇴후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 대단했다. 80세에 서거하면서 그는 "참좋군" 이라는 말을 남겼다. 긔의 묘비에는 "머리위에 빛나는 별, 내마음속엔 도덕법" 새겨져 있다. (과학과 형이상학을 모두 살리고자 하는 칸트 비판철학의 의도에서 비롯된이와 같은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의 대립은 이후 독일 관념론 철학에 끊임없는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중대한 철학적 테마가 되었다. 지식이 성립하는 과정은 경험과함께시작한다. 그러나 학문적 지식의 보편타당성, 즉 필연성과 보편성은 결코 경험으로 부터 나오지 않는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

24. 헤겔의 정신현상학 : (생동하는 실체는 오직 주체일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헤겔(1770~183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튀빙겐 신학교를 다녔으며 시인 횔덜린, 자연철학자 셸링과 함께 그리스 비극 작품을 읽고 프랑스 혁명에 환호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마치고 3년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칸트를 연구하였고, 낭만주의 극복하여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종합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 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그 결실이 정신현상학 이다. 헤겔의 생애에 결정적인것은 베를린 대학교 철학교수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당하여 민주적 개혁과 민족 통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는데 보수적인 구체제주의자와 개혁적인 귀족세력, 그리고 급진적인 학생운동 세력이 충돌하는 와중에 헤겔은 개혁적 귀족세력에게 가장 적절한 인물로 베를린 대학교 초청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계몽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개혁적이지만 다른 한편 낭만적 요소를 비판하여 보수적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에 기초하므로 독일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있어 후일 헤겔 좌파로 발전하였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처럼 독특한 책이 어디 있을까? 유례없이 난해하여 마치 히말라야의 고봉을 한걸음씩 헐떡거리며 오르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끝내 그 독해의 길을 멈출수 없도록 매력을 지닌 책이다. 헤겔은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자기 의식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25.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 토크빌(1805~1859)은 19세기 프랑스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인 동시에 정치가이기도하다. 외모가 외소한데다 잦은 병치레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낯선이들에게는 자존심이 강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친밀한 이들과는 편안하게 어울렸다. 1830년 보몽과 함께 미국의 교도소 개혁이라는 연구과제를 수행하기위해 미국으로 떠난 그는 9개월간 머물면서 미국의 감화원 시스템과 프랑스에의 적용 이라는 저서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1835년 영국방문이래 그는 밀, 시니어 등 영국 고위 정치인들과 지속적인 유대를 가졌고 영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840 미국의 민주주의 마지막 부분을 출판하고 하원에 진출하여 평생의 야망이였던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49년에 외부부장관까지 역임했다. 한편으로 공화국 대통령 루이 나풀레옹과의 노선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1851년 12월 루이 나풀레옹의 쿠데타로 짧게나마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기에 정치적 비관주의와 고독감에 빠졌다. 정계로 돌아가기 위한 전략으로 그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저서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856년 출판된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은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다시 한번 프랑스 지성계의 거물이 되었다. (토크빌은 프랑스에서는 콩트와 마르크스 등의 그늘에 가려 그의 지적 모델이였던 몽테스키외 만큼 인정받지못했지만 우파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적인 공화정 개념을 설정하기 위해서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반응은 대단하였으며 특히 미국의 현실정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국 공화정의 미래를 낙관하고 유럽을 능가할수 있는 잠재력과 활력을 지니고 있다고 예견한다. 평등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권위와 억압, 자유와 방종,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권력을 가르는 경계선을 마구 뒤엉키게 하는 상황 혁명을 초래할수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경우 사회의 평등은 권력의 전제화를 초래 사회도덕에 오히려 방해가된다. 고 예언)

26. 다윈의 종의 기원 : 다윈(1809~1882)은 영국 중부의 슈루즈베리에서 태어났다. 16세때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갔지만 수술광경을 보고 의사가 되기를 포기한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성직자가 되기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동식물과 지질현상같은 자연을 관찰하는 일에 더욱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1831년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를 탐험하는 동안 많은 동물들을 탐구했고 이때 생물이 진화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얻은후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종의 기원을 집필했다.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직후에는 교회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지만 그후 그의 이론은 확고한 과학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다윈의 다른 저작중에서 당시에 크게 주목받았고 아직까지도 관심을 끄는 책으로는 인간의 하강 및 성과 관련한 선택, 인간과 동물에서 감정의 표현 등이 있다 .

27. 밀의 자유론 : 밀(1806~1873)은 19세기 개혁의 시대에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일뿐 아니라 정치평론가 및 도덕이론가로 활동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벤담과 콩디야크 및 엘베시우스 등의 공리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유론, 의회개혁에 대한 견해 등의 저술은 윤리학과 정치학에 대한 의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였다. 1861년에는 자신의 도덕이론에 대한 반대이론에 응수하려는 의도에서 공리주의를 출판하였다. 현실정치에도 무관심하지 않아서 노예제 폐지를 찬성하는 미국 북부를 지지했으며 1865년 하원에 진출하여 활발한 토론및 집회활동으로 1867년 선거법 개정안등을 정부로 부터 이끌어 냈다. 1867년 여성참정권 협회의 창설맴버로 참여하였으며 1869년에는 부인의 예종 을 출판하였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밀의사고는 사회주의로 기울어 졌다. 20세기 여권론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 남녀간의 평등과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통합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

28. 마르크스의 자본론 : 마르크스(1818~1883)는 평생에 걸친 동지였던 엥겔스(1820~1895)와 함께 그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던 공산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상가이자 노동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평생을 투신한 혁명가이다. 마르크스는 법학으로 인생을 시작했지만 철학에서 진정한 학문적 관심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사회를 정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비판적 분석이라 판단하여 정치경제학 비판에 몰두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엥겔스는 역사유물론과 잉여가치론을 그가 유럽지성사에 기여한 결정적인 업적으로 꼽았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1804~1872)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역사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발전시켰고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 경제학의 비판적 연구로부터 잉여가치론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정치경제학을 발전시켰다. 그가 서구 학문과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방대하다. 마르크스주의는 후대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서구 사상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사상적 조류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와 동유럽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의 사상은 20세기 서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대립과 변혁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경제학 철학 초고, 독일이데올로기, 공산당선언, 루이보나파르트의 브뢰메르 18일, 요강, 자본론, 고타 강령 비판 을 꼽는다.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오언, 생시몽, 등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이렇게 다양성을 띠던 사회주의 사상적 흐름은 마르크스 사상으로 통합되어 오늘날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를 자신의 이윤으로 삼음으로써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이윤율이 저화되면 자본축적이 원활하게 이루워 질수 없다. 따라서 자본은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해야만 하는데 공황을 통해서 수행된다. 자본 축적의 내적인 모순들이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폭력적인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취약한 영세 자본가들은 몰락하고 강한 자본들만이 살아남는다. )

29. 뒤르켐의 사회분업론 : 에밀 뒤르켐(1858~1917)은 프랑스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지방으로 알려진 로렌 지방에서 태어나 유대교 정통파의 오랜 랍비 가문에서 성장했으며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와 파리 코뮌 이라는 유혈 봉기의 혼란한 와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러한 성장 과정은 그의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쳐 집단의식이나 집단의 도덕심 형성에 관심을 갖고 정치학 철학등에 관심을 가지며 콩트의 저서를 읽었으며 칸트철학에도 흥미를 보였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경제학 민속학 문화 인류학을 공부했다. 1887년에 보르도 대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소르본 대학으로 옮겨 교육과학과 사회학 강좌를 담당하였1906년에 교수로 임명 프랑스 최초의 사회학교수로 사회학의 보급에 힘을 쏟았다. 1896년 사회학연보를 창간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적 토론장의 역할을 했고 콩트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저서로는 사회학방법론의 제 규준, 사회분업론, 자살론, 종교생활의 기초적 형태 등이 있다. (사회학과 인류학 등 사회과학 전반에 끼친 뒤르켐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사회학에서는 베버와 마르크스와 더블어 사회학 고전 이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

30.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프로이트(1856~1939)는 지금은 체코의 영토가 된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리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낙천적이고 다정한 유대인 상인이였다. 어머니와는 세번째 결혼이였으며 사회적으로 편견의 대상이엿던 유대인 가정에 그리 부유하지도 않았으나 어머니의 관심과 배려는 극진했다. 학업성적이 뛰어나고 책벌레라는 독서광이었으며 걷기, 수영, 스케이트를 즐겼다. 한때 군인이 되고싶어서 한니발에 열광하기도 했지만 이후 법률를 공부하고자 하던중 마침 괴테의 자연에 대하여 를 읽고 의학과 자연과학분야에 눈을 돌렸다. 17세에 빈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876년 뱀장어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를 하면서 계속 신경계통의 연구에 전념 병원을 개업했다. 환자와의 접촉을 통해 질병치료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한다는 자극을 받게되었기 때문이다.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기위해 파리의 살테트리에르 병원에 유학한후 자유 연상법에 의한 스스로의 정신 분석법을 구축한다. 1890년 부터 1900년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학자로서 스스로를 확립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생애 최대의 위기였다. 그는 신경증이라는 알수없는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하던중 자신의 신경증에 부딪혔으나 자기분석이라는 어렵고 고통에 찬 시련을 극복하고 신경증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 이러한 자기 통찰의 결과는 꿈의 해석이라는 천재적 창조활동으로 나타나게되며 이를 통해 정신분석의 기초적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매년 적어도 한권의 중요한 책이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전 생애를 통하여 집필를 멈추지않았다. 꿈의 해석 이외에도 정신분석학 입문 정신분석학개요, 일상생활에서의 정신 병리학, 자아와 이드, 문명과 문명에 대한 불만, 불안의 문제 등의 저서가 있다. (불합리한 공포, 환상, 꿈, 성적갈등, 정신, 신체, 질병, 아동기의 성적발달 등 중요성을 이끌어 냈으며 인간행동의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케 해 주었다. 프로이트는 엄격한 결정론자였다. 종교적 가정도 형이상학적 가정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나 현상은 일정한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내부의 충동을 억제하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파괴적 에너지를 방출하여삶의 문제를 완화한다. )

31. 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 : 앙리 베르크손(1859~1941)은 폴란드계 유대인 작곡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 출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프랑스적인 철학자라 할수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미 박홍규에 의해 풀라톤 이후 최대의 형이상학자로 평가 받은바 있다. 베르크손은 중, 고교 시절부터 전국학력경시 대회의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 등에서 1,2등상을 휩쓸었으며, 프랑스 수재들의 집합소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철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후 앙제와 클레르몽페랑, 파리 등지에서 다년간 고등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41세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강의는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은 프랑스 지적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 4대 주요 저서이며 웃음, 정신의 힘, 사유와 원동자, 등의 저서가 있다. (평생동안 단하루도 쉴날이 없었다던 그의 생은 태어나서 일하고 죽었다. 철학자 최고의 수식어가 아깝지 않는 것이었다. 생명은 물질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성격을 띠며 복잡해 질수록 확동성과 자유, 즉 비결정성의 폭을 넓혀가는 흐름이다. 각각의 개체는 죽어갈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는 개체에서 개체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진다. 바로 생의 비약이다. )

32.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1864~1920)의 학문적 지적 배경을 알기위해 그의 가족관계부터 살펴보자.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베를린 시의회 의원을 거쳐 독일 의회의 의원을 지낸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부모의 성격과 가치관은 매우 차이가 났다. 이것이 후에 베버가 정신 질환을 앓게된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 사람들도 있다. 베버는 많은 책을 읽으며 자랐다. 대학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그는 쇼펜하우어, 괴테, 스피노자, 칸트 등의 저서를 통해 지식을 넓혔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해서는 법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국민경제학, 역사, 철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했다. 베릴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베를린 대학교와 프라이브르크 대학의 교수를 거쳐 1896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갈등을 계기로 심한 정신질환을 앓게되어 학문활동을 단념하고 1903년부터 15년동안 강단을 떠날수 밖에 없었다. 학교를 떠나있는 동안에도 그는 여행을 하며 많은 연구서와 논문을 기고했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 그동안에 발표한 논문이다. 세계 제1차 대전중에는 평화협상을 주장했고, 전후 바이마르헌법 기초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베버는 방법론, 정치사회학, 계층, 행위론, 관료제론, 등 업적을 남겼다. 주요저서로는 경제와 사회, 종교사회학 논점 등이 있다. (베버는 물질적 요인만이 사회변동을 가져오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라 정신적 태도, 가치관, 등도 문화변동의 중요한 요인이다. 물질적 요인만이 사회변동을 가져오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고 정신적 태도, 가치관 등도 문화변동의 중요한 요인이다.)

33.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1889~1976)는 성당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을 출간하였고, 형이상학이란 무억인가? 란 교수취임 강연 내용에서 기초 존재론을 넘어서 형이상학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치가 득세하던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나치에 대한 찬양으로 알려져 있어 제2차대전이 끝난후 조사를 받았지만 교수자격은 박탈당하진 않았지만 사임후 고향의 슈바르츠발트 숲속에 집을 마련하여 은거하면서 고요한 가운데 존재를 사유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낭만주의 전통을 근대에 되살려 놓았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사상들이 일반적이었다. 동시에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티 철학들이 등장 계몽주의를 비판하게되자, 그의 철학은 반계몽주의 철학으로 조명을 받게된다. )

34. 피아제의 아동지능의 기원 : 피아제(1896~1980)는 스위스 작은 대학촌 뇌샤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역사학자 어머니는 신앙심이 강한 지적인 여성, 피아제는 21세에 자연과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3세가 되면서 아동심리분야에 대한 정신발달 연구를 하면서 27세에 아동정신의 본질이 자기중심성에 있음을 발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늘날 아동의 사고와 발달, 지능, 교육에 관한 연구들에서 피아제를 언급하지 않은 연구가 거의 없다. (신생아도 학습할수 있다는 피아제의 주장은 혁명적이다. 생물학적 움직임에 심리적 의도의 요소가 있음을 포착한 점은 인간지능의 발달에 새로운 통찰을 가능케해 주었다. )

35. 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 : 구조주의 선구자 레비스트로스(1908~1991)는 프랑스 대표적인 인류학자이며, 철학자, 사상가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생후2개월에 프랑스로 돌아가 제2차 세계대전동안 나치를 피해서 1946년 미국에 머문것을 제외하고 계속 프랑스에서 살았다. 마르크스 저작을 탐동하고 법학사와 철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31년 23세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 27세에는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사회학교수로 부임한다. 슬픈열대 주제가 된 브라질 네 개 원주민 사회에 대한 민족학적 조사를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박물관 부관장을 거쳐 파리대학 문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친구의 기본구조, 인종과 역사, 슬픈열대, 구조인류학, 야ㅇ생의사고, 신화학, 1981년 (73세)에 정신문화연구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바 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화현상들은 보편적인 사고구조와 자연환경과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문화는 심층구조에는 보편적인 기본 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인들의 약탈과 파괴를 고발한 책에 나타난 사례들은 서구문명이 순수한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으로 여겨졌는지를 그리고 슬픈열대는 모든 사회가 서구문화쪽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발전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

36.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1900~1980) 은 프랑크프리트에서 태어나 독실한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 뮌헨과 베를린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였다. 1933년 나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망명하였다. 마르크스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융합 현대 자유의 의미를 천착하는 휴머니즘 사상을 발전시켰다. 자본주의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상실과 인간회복, 건전한 사회, 마르크스인간개념, 사랑의 기술, 희망의 혁명, 소유냐 존재냐, 인문사회서적으로 한국에서도 독자층이 많다. (현대사회의 여러 병리들을 폭로함으로서 현대인을 각성시키는데 기여 20세기 휴머니즘 사상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휴머니즘 사상가로 기록될것이다. )

37.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 하이젠베르크(1901~1976년)뮌헨대학에서 문리학을 공부후 노벨상 수상자 보른과 보어 밑에서 양자 역학을 연구했다. 26세 라이프치히 정교수로 임명되었고, 1932년 양자역학 확립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히틀러 치하에서 원자탄을 연구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후에는 물리학 연구소장을 지내다가 은퇴했다. 저서로는 부분과 전체, 현실의 질서, 경계를 넘어서 등이 있다. (원자무기는 제2차 대전중에 연합국에서 먼저 개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대전후에도 연구하지않았다. 이유는 여러 여건들이 난무하다. 사망할때까지 20년간 양자역학 연구를 종합하는 의미를 지닌 소립자 세계의 통일장 이론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연구에서 많은 결과를 얻었고 세상을 놀라게 했다. )

38. 사르트르의존재와 무 : 샤르트르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사관 어머니는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 여동생이였다. 2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서 무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11세때 어머니 재혼으로 자신이 있을곳이 없다는 것을 의식을 어린 나이인데도 가졌다고 한다. 교수자격시험 합격후 시몬느 보부아르와 2년간 계약결혼을 하고 생애의 반려가 되었다. 병역 종사후 중학교사로 있던중 현상학을 접하고 충격받는다. 상상력, 자아의 초월, 정서론 소묘, 상상력의 문제, 모두 현상학적 기초위에서 저술되었다. 1941년 파리로 돌아와 대독일 레지스탕 운동에 참가했다. 1945년 특파원으로 도미하였고, 귀국후 현대 잡지를 펴내면서 실존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소련, 중국, 남미 방문 철학, 문학, 평화운동 등 세계적인 활동을 계속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절하였다. (세상사에 관하여 증대되는 나의 의심과 혼란에 직면하여 나 혼자서 나자신의 상황속에서 자유롭고 책임감있게 그리고 진실하게 나 자신의 기획을 추구하고, 도덕적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점에서 사르트의 사상이 갖는 시대사적 의의와 가치는 결코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의식적 존재만이 스스로가 결여하고 있는 것 가능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나아가 자신조차 부정할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인간이 순전한 자유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무에 대한 의식이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가장 불안으로 부터 도피하고자하는것. 종교는 그러한 도피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무에 직면하는 순전한 자유 이것이 우리가 받아 들이고 누려할 인간의 조건이다. )

39.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쿤(1922~1996)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과학사와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과 인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학이 정상 과학으로부터 혁명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이행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하바드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태양중심체계의 형성에 대해서 연구중에 패러다임의 전환의 변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고, 1962년에 처음 출판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상세히 전개한다. 메사추세츠 공대에서 과학철학교수를 지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주요한 긴장, 흑체이론과 양자 불연속성 등 저서가 있다. (과학혁명이 낡은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치됨으로서 일어난다고 하면, 과학이란 끊임없이 발견과 이론이 쌓여 가면서 발달하는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과정이 될수 없다. 과학의 발달은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면서 진행된다.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의 중요성에서 정상과학이 자연의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늘어날수 있는데 그때 정상과학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상과학은 새로운 과학에 자리를 내어주게된다. 이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불렀다. 새로운 틀을 추구하는 것이다. )

40. 롤스의 정의론 : 롤스(1921~)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정의론 분야에서 최고봉을 이루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이다. 1950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2하버드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1971년 정의론은 정의이론의 영역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한다.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적 확고한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이후 20년간 노력을 집대성하여 1993년 제2의 대작 "정치적 자유주의" 출간한다. (정의의문제는 이익과 부담의 배분을 둘러싸고 대립되는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요구들이 있을 경우, 그리고 개인들 서로간에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에 생겨난다. )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개척해 나가는 발전적 자아실현이다. 여기에서 꿈과 희망의 싹이 움튼다.

 

※ 참고문헌 ~ 한국방송통신학교 문화교육학과 편 동서양 고전.

 

 

 

 

제2편 논어 49선

 

 

 

1.子曰 巧言令色이 鮮矣仁이니라.  (교언영색 선의인) 교묘하게 꾸민말과 보기좋게 꾸민 얼굴빛에는 어진 마음이 드물다


 


2.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니라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쉰에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어떠한 말을 들어도 그 이치를 깨달아 저절로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일흔에는 내마음 대로 행동을 하여도 법도에 어긋 나는 일이 없었다.


3.子曰 溫故而知新이면 可以爲師矣니라.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것을 알고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면 능히 스승이 될 수 있다.


4.子貢이 問君子한대 子曰 先行其言이오 以後從之니라.(자공 문군자 자왈 선행기언 이후종지). 자공이 군자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먼저하고자 하는 일을 행한 후에 말을하는 사람이 군자다. .


5.子曰 見義不爲 無勇也니라. (견의불위 무용야). 옳은 일을 보고도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6. 成事라 不說하며 遂事라 不諫하며 旣往이라 不咎로다.(성사 불설 수사 불간 기왕 불구) 이미 이루어진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다.


7. 子曰 放於利而行이면 多怨이니라. (방어리이행 다원)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을 하면 원망을 많이 받는다.


8. 子曰 不患無位오 患所以立하며 不患莫己知오 求爲可知也니라.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벼슬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의 자격을 근심하며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 만 한일을 하고자 노력하라.


9. 子曰 君子는 欲訥於言而敏於行이니라.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 군자는 말은 더디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



10. 子曰 德不孤라 必有隣이니라.( 덕불고 필유린)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


11. 子游曰 事君數이면 斯辱矣오 朋友數이면 斯疏矣니라.(자유왈 사군삭 사욕의 붕우삭 사소의) 자유가 말하길 임금을 섬기는데 자주 간하면 욕이 되고 벗을 사귀는데 자주 충고를 하면 사이가 벌어진다.

 

12. 子貢對曰 回也는 聞一以知十하고 賜也는 聞一以知二하노이다. (자공대왈 회야 문일이지십 사야 문일이지이) 자공이 대답하길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자공)는 하나를 들으면 둘밖에 모릅니다.


13. 子貢이 曰我不欲人之加諸我也를 吾亦欲無加諸人하노이다. --(자공 왈아불욕인지가저아야 오역욕무가저인) 자공이 말하길 나는 남이 나에게 하는것중 좋지 않으면 저도 남에게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14. 子曰 不恥下問이라    (불치하문)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15. 子曰 人之生也 直하니 罔之生也는 幸而免이니라. (인지생야 직 망지생야 행이면) 인간의 삶은 원래 정직한 것이다,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하고 있는 것이다.


16. 子曰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오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알기만 하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사는 사람은 즐기는사람만 못하다.



17.子曰 知者는樂水하고 仁者는樂山이니 知者는動하고 仁者는靜하며

        知者는樂하고 仁者는壽니라.(지자 요수 인자 요산 지자 동 인자 정 지자 낙 인자 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자는 동적이며 인자는 정적이며,지자는 즐겁게 살며 인자는 장수한다.

 

18. 夫仁者는 己欲立而立人하며 己欲達而達人이니라.  (부인자 기욕립이립인 기욕달이달인) 인자란 자신이 나서고 싶을 때 남을 내세우며,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으면 남을 먼저 달성하게 한후 자기가 한다.



19. 子曰 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矣니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는 於我에 如浮雲이니라.  (불의이부차귀 어아 여부운)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어도 즐거움이란 그속에있으며 의롭지 않은 부와 귀는 나에게는 하나의 뜬구름과 같다.

 

20.子曰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니 擇其善者而從之오 其不善者而改之니라.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듯이 나의 스승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의 착한 점을 골라서 따르고 나쁜 점은 살펴서 스스로 고쳐야 한다.


21. 子曰 奢則不孫하고 儉則固니 與其不孫也론 寧固니라. (사즉불손 검즉고 여기불손야 영고) 사치하면(호사스럽게 살면) 불손하기쉽고, 검소하면 고루해지니 거만한것보다 차라리 고루한 것이났다.


22. 子曰 君子는 坦蕩蕩이오 小人은 長戚戚이니라. (군자 탄탕탕 소인 장척척)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에 차 있다.

 


23.曾子 言曰 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니라. (증자 언왈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증자가 말했다. 새가 죽을 때에는 그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말이 착해집니다.

 

24. 曾子曰 以能으로 問於不能하며 以多로 問於寡하며 有若無하며

    實若虛하며  犯而不交를 (증자왈 이능 문어불능 이다 문어과 유약무 실약허 범이불교) 증자가 말하길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도 묻고, 박학다식해도 잘 알지못하는 사람에게 묻고, (도가)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실하면서도 허한 듯이  하며, 또 남에게 욕을 보아도 따지고 마주 다투지 않는다.


25. 子曰 不在其位하얀 不모其政이니라.(부재기위 불모기정) 그 직위에 있지 않거든 그 자리의 정사를 논하지 말라.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

 


26. 子 在川上曰 逝者 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 (자 재천상왈 서자 여사부 . 불사주야) 공자님이 냇가에서 말하길 지나가는 모든 것은 흐르는 물과 같구나 밤낮없이 멈추지 않는구나.

 


27. 子 絶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자 절사 무의무필무고무아) 공자께서 네 가지를 근절 하셨으니 자의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집착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안부리고, 자기만을 내 세우는일이 없었다.


28. 子曰 吾未見好德이 如好色者也니라 (오미견호덕 여호색자야)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자를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아직보지 못했다.


29.子曰 三軍可奪帥也어니와 匹夫는 不可奪志也니라. (삼군가탈수야 필부 불가탈지야) 삼군에서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한 사나이로부터 그 지조는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30.入不中門하시며 行不履 이러시다. --(입부중문 행불리역) 설 때에는 문의 중앙을 피하셨고 들어갈 적에는 문지방을 밟지 않으셨다.


31. 席不正이어든 不坐러시다.(석부정 부좌) 자리가(좌석의 깔개 등)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32. 廐焚이어늘 子 退朝曰 傷人乎아 하시고 不問馬하시다. (구분 자 퇴조왈 상인호 불문마) 마구간에 불이 난적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조정에서 퇴근하셔서 사람이 다쳤는가 하고 말씀하시고 말은 물어 보지 않으셨다.


33. 子曰 才不才에 亦各言其子也니 (재부재 역각언기자야) 勿視하며 非禮勿廳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 (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공자께서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 것이다.


34. 仲弓이 問仁한대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 (중궁 문인 기소불욕 물시어인) 중궁이 인에 대하여 묻자 자기가 하고 싶지 아니 한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35. 子曰 士而懷居면 不足以爲士矣니라. (사이회거 부족이위사의) 선비가 편안하게 살기만 생각한다면 선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36. 子曰 有德者는 必有言이어니와 有言者는 不必有德이니라. (유덕자 필유언 유언자 불필유덕)

         仁者는 必有勇이어니와 勇者는 不必有仁이니라.(인자 필유용 용자 불필유인)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들을만한 말을 하지만, 말이 들을만 하다고 다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자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있지만,용기가 있다고 다 인자한사람은 아니다.


 

37.子曰 不怨天하며 不尤人이오 -(불원천 불우인)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38. 子曰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니라. (인무원려 필유근우)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에 근심이 생긴다.


39.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則遠怨矣니라.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


    자신을 꾸짖기는 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길 가볍게 하면 남의 원망하는 소리를 멀리할 수 있다


40. 子曰 君子는 求諸己오 小人은 求諸人이니라. (군자 구저기 소인 구저인)


    군자는 모든 책임의 소재를 자신에서 구하나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41. 子曰 君子는 固窮이니 小人은 窮斯濫矣니라. (군자 고궁 소인 궁사람의)


     군자는 곤궁을 잘 견딜 수 있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마구 행동을 한다.



42. 孔子曰 君子 有三戒하니 少之時에 血氣 未定이라 戒之在色이오

            (공자왈 군자 유삼계 소지시 혈기 미정 계지재색)


    군자가 경계해야 할 세가지가 있다 젊었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색을 경계하고,


43  及其壯也하야 血氣 方剛이라 戒之在鬪오 及其老也하야 血氣 旣衰라 戒之在得이니라

           (급기장야 혈기 방강 계지재투 급기노야 혈기 기쇠 계지재득)


    장년에는 혈기가 바야흐로 왕성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혈기가 이미 쇠잔했으므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44. 孔子曰 君子 有三畏하니 畏天名하며 畏大人하며 畏聖人之言이니라

            (공자왈 군자 유삼외 외천명 외대인 외성인지언)


     군자는 두려워할 일이 세 가지 있다. 천명을 두려워하며 큰 인물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45. 孔子曰 生而知之者는 上也오 學而知之者는 次也오 困而學之는 又其次也니 困而不學이면 民斯爲下矣니라.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 (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오, 막힘이 있으면서도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니라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 된다.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 하우(下愚)


46. 孔子曰 君子有九思하니 視思明하며 聽思聰하며 色思溫하며 貌思恭하며 (공자왈 군자유구사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군자에게는 아홉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볼 때는 명백히 보기를 생각하고 듣는 것은 총명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용모는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하기를 생각한다,


47. 言思忠하며 事思敬하며 疑思問하며 忿思難하며 見得思義니라.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말은 성실하게 하기를 생각하고 일에는 신중하기를 생각하고, 의심가는 것에는 묻기를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한다.

 

 

48.子曰 唯女子與小人이 爲難養也니 近之則不孫하고 遠之則怨이니라 (유녀자여소인 위난양야 근지즉불손 원지즉원)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 하면 원망을 한다.

 

49. 子曰 衆惡之라도 必察焉하며 衆好之라도 必察焉이니라.(중오지 필찰언 중호지 필찰언)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